한강타임즈= 손우현 기자
프랑스 철학가 질 들뢰즈Gilles Deleuze에 따르면, 화가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서양 미술사를 정리한다. 다빈치, 마네, 모네, 마티스, 피카소, 뒤샹, 워홀 등은 미술사의 큰 흐름을 이해한 다음에 자신들의 시대에 맞는 새로운 그림을 그렸다. 인상주의나 팝 아트는 이를 어기는 듯하나, 표현법이 워낙 새로워서 생긴 오해일 따름이다. 그렇다면 바실리 칸딘스키 Wassily Kandinsky (1866~1944)는 무엇으로 미술사에서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냈을까? 답을 얻기 위해서는 조제프 니에프스Joseph Niepce(1765~1833)부터 알아야 한다.
사진이 촉발시킨 추상화
니에프스는 1826년경 창문으로 보이는 건물 지붕을 새로운 이미지 기계 장치로 포착한 프랑스의 발명가다. 그가 촬영한 새로운 이미지는 사진이었고, 《건물 지붕》은 인류 역사상 최초의 사진이었다.
초기의 사진기가 재현해 낸 현실은 실재에 비해 몹시 조악했다. 하지만 사진기와 렌즈 등 광학 기술과 필름을 현상하는 화학 기술이 발전하면서 사진은 아주 정교하게 현실을 기록할 수 있게 됐다. 그러자 사람들은 기계를 이용하는 사진이 인간의 손으로 그린 그림보다 더 정확한 기록 수단이라 믿었고, 화가에게 초상화를 의뢰했던 사람들은 사진관으로 향했다. 밥벌이를 잃은 화가들은 서둘러 사진 기술을 익혔고, 일부는 그림을 붙들고 사진을 저주했다. 그리고 아주 일부의 실험적인 화가들은 사진과 그림은 다르다며, 오로지 그림만이 할 수 있는 무엇을 찾아 나섰다. 그렇게 칸딘스키를 비롯한 화가들이 추상화를 개척했고, 화가들은 캔버스에서 무엇이든 그릴 수 있는 무제한의 표현의 자유를 갖게 됐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에 견줄 만한 미술사의 위대한 발견이었고, 칸딘스키의 이름은 미술사에서 크게 기록됐다. 그렇다면 칸딘스키가 추상화를 개척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무엇일까?
완전히 새로운 회화의 가능성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태어난 칸딘스키는 어려서 그림에 상당한 재능을 보였지만, 법률과 경제학을 전공하고 대학 법학부 강사를 했다.
종종 전시회에 가곤 했는데, 클로드 모네의 〈건초 더미> 연작을 직접 보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모네를 연구하면서 칸딘스키는 이제 화가는 색채와 형태를 이용해 세상을 자유롭게 그려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결과물이 〈색채 연구, 동심원과 네모들 Color Study Squares with Concentrice Circle)이다. 여전히 현실에 닮게 그리던 초기작 〈뮌헨의 집>과는 완전히 다르다. 이렇듯 사진의 시대에 칸딘스키는 서양미술사에서 최초로 현실을 추상화로 표현했다.
칸딘스키가 추상화를 본격적으로 추구하던 1910년대 유럽 미술계의 스타는 야수파의 마티스와 입체파의 피카소였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그리되 색채의 효과를 강조한 야수파, 다양한 시점에서 본 대상을 한 화면에 중첩시킨 입체파의 작품들이 쏟아지던 시대였다. 그에 비해 칸딘스키의 추상화는 지나치게 과격하고 몹시 전위적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칸딘스키의 추상화는 아무리 봐도 뭘 그렸는지 도대체 모르겠지만, 그림 속 형태와 색채들이 어우러져 마치 한 곡의 음악을 듣는 듯 하다는 평가에는 고개가 끄덕여진다.
좋아하는 그림에 스스로 가치를 부여할 수 있기를
우리가 알고 있던 화가들의 고귀한 작품에도 때론 정치적인 영향력이, 괴짜의 컬렉터의 욕심이, 작가나 화상의 퍼포먼스가, 민족 정서가 반영되기도 한다. 저자가 소개하는 흐름대로 책을 읽다 보면 서양미술사의 흐름이 보일 뿐 아니라 미술시장이 천문학적인 돈을 남기는 엄청난 투자처이고 보이지 않는 손과 때로 모략도 존재하는 곳임을 알게 된다. 예술적 위대함은 순전히 위대함 그 자체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아이러니, 그러니 비싼 그림이 반드시 역사적으로 중요하거나 가치 있는 그림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동섭 저 | 몽스북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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